[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참된 겸손은 굴욕을 받아들이는 것”


프란치스코 교황은 대림시기의 여정을 시작하면서, 12월 5일 화요일 오전 산타 마르타의 집에서 집전한 미사 강론을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두 가지 기본적인 측면을 지목했다. 곧, 예수님을 따라야 할 의무와 지켜야 할 삶의 양식이다. 교황은 이날 전례에서 제시된 이사야 예언자의 구절(11,1-10)에 관한 성찰에 집중했다.

교황은 이 구절이 “주님의 오심,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가져다 주실 해방, 약속의 성취에 대해 말씀하시는” 구절이라고 설명했다. 첫 번째 구절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고 선포한다. 교황은 “새싹처럼 작은” 것이라는 예언자의 이 표현을 숙고하면서, 즉각 그 위에 “지혜와 통찰의 성령, 식견과 용기의 성령, 지식과 경외의 성령이신 주님의 성령께서 내려오실” 그 “나뭇가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이것이 첫 번째 기본적인 측면이다. “새싹의 작음에서 성령의 충만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약속이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 작은 것 안에서 시작하고, 뿌리에서 싹이 움트고, 새순이 돋아납니다. 성령께서 바로 그곳에 계시기 때문에, 성장하고, 앞으로 나아가며, 충만에 이릅니다.”

아울러 교황은 예수님 안에서도 역동성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당신 백성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당신을 소개하셨다. “내가 그 새싹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이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당신께서 파견되셨음을 인식하신 것이다.

교황은 이러한 역동성을 “그리스도인의 삶”에 적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우리 각자는 성장해야 하고, 우리 안에 성령께서 충만하실 때까지, 성령의 힘으로 성장해야 하는 그 뿌리의 새싹이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이어 교황은 이렇게 물었다.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어떤 것입니까?” 그 답변은 간단하다. “우리 안에 자라고 있는 새싹을 보호하는 것, 성장을 지키는 것, 성령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성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에페 4,30)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은 “새싹을 보호하는 것, 성장을 지키는 것, 성령을 보존하는 것, 뿌리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아울러 교황은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혔다. “그대가 비롯된 곳, 그 뿌리를 잊지 마십시오. 그대가 어디에서 왔는지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지혜입니다.”

만일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라면, “그 삶의 양식은 어떠해야 합니까?” 교황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예수님과 같은 삶의 양식은, 겸손이라는 게 분명합니다.” 사실 “이 새싹을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믿음과 겸손이 필요하고, 이처럼 작은 선물은 성령의 충만한 선물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성부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것처럼,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십니다’(루카 10,21). 매일의 삶에서, 겸손은 “새싹처럼 작은 것이고, 매일 자라나는 작은 것이며, 자신의 삶의 충만을 향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위해, 성령이 필요한 작은 것입니다.”

교황은 또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하셨고, 하느님께서도 겸손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수없이 인내하셨고 참으셨기 때문에, 겸손한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겸손은 예수님의 겸손 안에서 드러납니다.”

하지만 교황은 겸손이라는 말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어떤 사람은 겸손하다는 것이 교육을 많이 받고, 예의 바르며, 기도할 때 눈을 감는 것, (...) 등으로 믿으며, (...) 상본에 나오는 얼굴 표정을 짓습니다. 아닙니다. 겸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황은 해석의 열쇠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하나의 기호, 하나의 표징, 유일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굴욕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굴욕 없는 겸손은 겸손이 아닙니다. 겸손이란 굴욕을 당하신, 위대한 굴욕을 감내하신, 예수님께서 견디셨던 것과 같은 굴욕을 견딜 수 있는 남녀의 겸손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에게는 어떤 시련이 주어지는가? “많은 경우, 우리가 굴욕을 당할 때, 누군가에게 굴욕 당했다고 느낄 때, 즉각 응대하거나 방어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을 바라봐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굴욕의 순간에 침묵하셨습니다.” 따라서 “겸손은 단지 고요하고 평온한 것이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겸손은 예수님처럼 굴욕을 당할 때, 그 굴욕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새싹을 보호하고, 성장을 지키며, 성령을 보존하는 능력을 갖추신”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굴욕”을 받아들이도록 부르심 받았다.

이는 간단하고 직접적인 일이 아니다. 교황은 이와 관련해 언젠가 어떤 사람이 이렇게 농담했던 것을 들었다며 하나의 사례를 들었다. “네, 네, 겸손. 물론 그렇지만, 굴욕은 절대 못 참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 저는 겸손을 받아들이고, 겸손해지는 것을 받아들이지만, 굴욕이 없는, 십자가 없는 겸손만 받아들입니다.”

교황은 강론을 끝내면서,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우리 각자 안에 새싹을 보호해야 합니다. 성장하는 것을 지켜야 하고, 우리를 충만으로 이끌어주실 성령을 보호해야 합니다. (...) 뿌리를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삶의 양식은 무엇입니까? 바로 겸손입니다. (...) 우리가 겸손한지 어떻게 압니까? 주님의 은총으로 굴욕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것이 겸손입니다. (...) 수많은 성인들은 굴욕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주님, 당신과 더 비슷해지도록, 당신을 닮을 수 있도록 저에게 굴욕의 기회를 주십시오’라고 청했습니다. 그들의 모범을 기억합시다.”

마지막으로 교황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을 향해 이 작은 씨앗을 지키고, 뿌리를 잊지 않으며, 굴욕을 받아들이는 은총을 주시기를 바란다”며 강론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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